'Only The Beginning Of The Adventure', 그리고 <나니아 연대기>에 관한 묵상.
어릴 적 사촌오빠와 아빠를 따라 본 반지의 제왕 삼부작은 그 방대하고 복잡한 세계관으로 인해, 초등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2005년에 개봉한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와 옷장>은 나처럼 이유식을 먹어야 할 나이에 소고기를 먹어버린 서양 판타지 입문자가 쉽게 보기 참 좋았던 영화였다.
어린 마음에도 에드먼드를 위해 죽은 아슬란이 부활한 장면을 보고 '우와 예수님 같다!'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게 맞았었다. 책다운 책을 읽어가기 시작할 즈음 드디어 이 영화가 원작자이자 기독교학자인 C.S. 루이스가 저술한 나니아 연대기의 두 번째 시리즈를 토대로 제작한 영화였으며, 원작 시리즈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나니아를 건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수년 사이 이 시리즈를 몇 번이나 탐독했는지 모른다. 분명 대학교 오기 전까지 참 자주 읽었던 것 같다.
(영화는 잘 못 보겠더라. 사자마녀옷장은 원작을 정말 잘 살려서 아직도 보면 오열하는데, 캐스피언 왕자는.... 수잔이랑 럽라 생긴다는 거 듣고 케붕 와서 영화를 볼 엄두가 사실 아직도 나지 않기에 그냥 이건 내 맘속에 묻어두는 거로... 새벽출정호의 항해도 마찬가지. 다들 소설 속 유스터스랑 똑같다고 하던데 이미 캐스피언 왕자를 볼 때마다 수잔이 떠올라서 이것도 역시 포기ㅋㅋㅋ)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몇 개월간의 유튜브 노마드 생활을 하며 이런저런 노래들을 듣다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날 나니아 연대기 사운드트랙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이 노래 덕분에 어릴 적 품었던 나니아를 향한 탐구와 열정이 되살아났다.
그니까, 아마 오늘 글은, 나니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네 왕과 아슬란에 관한 묵상(?) 글과 더불어 대관식 장면 배경음악에 쓰인 곡 'Only The Beginning of The Adventure' 에 관한 이야기가 될 듯 하다.
<사자, 마녀와 옷장> 속 네 왕의 성격과 내 생각
아슬란은 에드먼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고, 태초의 심오한 예언에 따라 부활하였다. 부활한 아슬란은 전쟁으로부터 나니아를 승리로 이끈 후 아담의 두 아들과 하와의 두 딸인 사남매를 각자 나니아의 동서남북을 분할 통치하도록 왕으로 세웠다.
1. 모든 것의 첫 시작이었던 용감한 막내 Queen Lucy the Valiant
루시는 초반 언니 오빠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자신 있게 주장하여 믿음의 통로 역할을 해내고 말았다. 루시는 의심 따위 하지 않는다. 물론 그 앞뒤 안 가리는 용감한 믿음 때문에 초반 툼누스 씨의 계략에 휘말릴 뻔하지만, 어쨌든 그 특유의 선함과 담대함으로 나니아를 오랜 암흑기를 종식한 첫걸음을 해낸 건 바로 모두가 무시했던 루시였다. 가장 어리기에 가장 순수했던 걸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루시가 그 어린아이의 대표 격일지도 모른다. 보고 듣고 경험한 것 그대로를 믿는 그런 믿음.
루시는 나니아에 들어가자마자 그 존재 자체를 완전히 확신했는데, 믿음 생활을 한 시간이 꽤 긴 나는 내가 믿는 분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매일 내게 말씀하신다. 항상 내 옆에 계신다. 그걸 참 잘 안다. 그런데도 매 순간 낙담하고 절망한다. 혹은 모든걸 망각하여 숨이 쉬어지는 대로, 손이 가는대로, 입이 움직이는대로 살게 된다.
자, 그럼 이제 뼈아픈 갱생 전 에드먼드 혹은 나니아를 잊어버린 수잔처럼 되어버리는 건 시간문제다.
2. 죄인의 몸에서 의로운 소년으로 성장한 셋째 King Edmund the Just
에드먼드는 루시를 제일 많이 놀린 오빠다. 철이 없고 매사가 골칫거리다. 사람을 개빡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전형적인 둘째오빠같은... 그런 포지션인 인물이다. 루시가 나니아를 들어가는걸 보고 뒤따라 나니아에 입성... 거기서 하얀마녀가 준 터키젤리에 속아 자기 형제들을 팔아버렸으며, 비버부부에게 처음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유일하게 불쾌함을 느꼈던 아이다. 그리고 하얀마녀가 해준 말처럼 나니아의 왕자노릇을 할 수 있을거라 여기며 자신이 한 선택이 옳았다고 자부했으나, 결국 죄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죄수들을 차가운 돌로 만들어버리는 마녀의 본모습을 보고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자각한다.
난 어쩌면 에드먼드보다도 지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난 '믿는 사람'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내 독자적인 길을 계획한다. 그 길은 아주 찬란하고 빛이 난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기도와 말씀 묵상은 현저히 줄어들고 온갖 세상의 정보에 귀기울이고자 한다. 그 끝에는 좌절만 있다. 아 결국 난 지독한 죄인임을 스스로 확인한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슬란은 그런 에드먼드를 위해 하얀마녀에게 직접 발걸음 해 돌탁자 위에서 죽는다. 그리고 삼 일만에 루시와 수잔이 보는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은 매일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고 삼 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주님, 전 맨날 배신만 때리는데 그래도 제가 좋으세요? 전 맨날 의심하고 잊어버리는데, 그래도 제가 그렇게 좋으신가요?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은 내 머리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돌아간다.
에드먼드는 행위로 인함이 아닌 아슬란의 존재를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이후 정의로운 왕이 된 에드먼드는 정말 성화하여 아슬란의 말에 순종하며 통치할 수 있었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오길. 매 순간이 예수님의 임재에 거하며 충만해지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안에서 의롭고 지혜로운 자로 거듭나길 정말 간절히 기도해본다.
3. 현실적이지만 현실 이상의 것을 믿었던 Queen Susan the Gentle
수잔은 현실적인 인물이다. 상황판단에 능한 인물이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나니아에서 나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제일 많이 했던 인물이기도 하지만, 네 남매의 갈등을 곧 잘 중재했던 꼭 필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루시를 가장 잘 챙겼던 따뜻한 마음씨의 언니다. 루시와 함께 아슬란의 부활을 눈으로 직접 봤다. 그녀는 분명 아슬란과 나니아의 삶을 아주 생생히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 수록 나니아를 어릴적 소꿉놀이로 치부해버린다. 그리고 제 7권 <마지막 전투>에서 수잔은 선한 등장인물 중 나니아를 영영 놓쳐버린 유일한 인물이 된다.
하나님은 지극히 상식적인 분이시다. 이 세계를 창조하셨으니, 상식 또한 창조하셨을테니. 그러나 그 상식을 초월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나는 자꾸만 하나님을 내가 경험한 세계 안으로만 가두려고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내 멋대로 판단하거나, 혹은 그냥 그 자체를 놓아버린다. 뭔가.. 에드먼드의 역행버전이랄까. 난 수잔쪽에 가까운 듯.
수련회가 끝난 직후, 예배가 끝났을 때, 모든걸 쏟아부은 기도 끝 등등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 속에서 나는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고 앞으로도 그 은혜대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정신차리고 보면 난 믿지 않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책 속의 수잔을 보고 안타까워하지만, 내 모습이 수잔이라는걸 알지도 못한 채 그렇게 믿음을 잃은 사람처럼 살아버리는거지.
4. 그리고 주어진 사명에 순종했던 리더이자 첫째 King Peter the Magnificent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바울처럼! 오직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 말씀대로 살고자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무진장 노력했던 바울처럼 살아야지. 피터는 바울의 털끝만큼도 못따라온다. 그렇다면 나는 피터의 발끝만큼도 못따라온다.
피터도 바울과 시작이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믿지 않는 자로 출발했으니까. (매우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어쨌든) 바울이 예수님을 드라마틱하게 만났듯이, 피터도 아슬란을 직접 경험했다. 아슬란은 청년이 되지 못한 소년을 점점 왕으로 훈련시켰다. 에드먼드와 치고받고 싸우기에 여념없었던 피터는 "For Aslan!"을 외치며 전투에 뛰어드는 용맹한 왕이 되었다. 아슬란이 (에드먼드를 대신하여 희생하러) 떠나버린 나니아 진영은 정말 허무했을거다. 모두들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아슬란님은 없어 나니아는 멸망할거야! 그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믿음을 지켜낸 인물이다. 융통성 없어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피터는 부대를 이끌고 기꺼이 전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아슬란과 나니아를 위해 맹렬히 싸운다.
영화 속 피터가 하얀마녀와 정면으로 싸우는 장면은 정말 큰 감동이었다. 피터는 하얀 마녀를 능히 무찌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게 피터의 한계였으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사탄과 싸울 수 없다. 당당히 이겨 싸우기엔 난 피터처럼 너무나도 나약하다. 그러나 그 뒤에 멋지게 부활하여 등장한 아슬란과 함께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슬란은 하얀마녀를 자일리톨 씹듯 화끈하게 해치워버린다.
결국 내가 모든 것을 능히 해낼 수도 없다. 그렇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면 말이 다르다. 나는 피터처럼 절망의 상황 속에 처할 수도 있고, 스스로의 나약함과 무기력에 좌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께하니까!
<Only The Beginning Of The Adventure>
영화와 책 끝에 아슬란은 네 남매를 나니아의 왕과 여왕으로 임명한다.
그들은 아슬란과 나란히 왕좌 앞에 걸어가 왕관을 수여받고, 아슬란은 이렇게 말한다.
"Once a king or queen of Narnia, always the king or queen."
(아휴 이거 뭐 다분히 기독교적이어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번 주님의 자녀라면 영원히 주님의 자녀란다!"
이 대사가 어찌나 좋던지, 마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 이 장면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멋진 대사와 더불어 나오는 웅장한 배경음악이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데, 노래 제목이 흥미롭게도 'Only The Beginning of The Adventure' 이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었는데, 이제 이게 겨우 대모험의 시작이라고요?
물론, 앞으로 이들이 겪을 모험이 총 5권 더 남아있는데 그걸 염두해두고 지은건지, 아니면 실제로 저 제목이 나중에 등장인물 중 한 명의 대사를 인용한건지 영화 끝부분을 다시 봐야 알 것 같다. 근데 내 감상이 제일 중요한거 아니겠어?
이제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사게 될테다. 이게 시작이라는거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예수님 행하신 그 길대로 우리도 함게 걷고, 하나님 말씀에 기쁨으로 동행하고 순종하는 법도 배우고, 무엇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시들과 어려움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해야할 것이다. 쉽지는 않을거다. 고난과 회의도 많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은 Suffering 혹은 Torment 가 되어야 하는데 한없이 밝아보이는 Adventure 를 쓴 이유는 뭘까? 너무 당연히도 이 모든 것 시작-중간-끝에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3
예수 그리스도 한분 만으로 참 충분하다. 참 좋다. 참 기쁘다.
다가올 ccc 겨울 금식수련회 주제가 <주님께로 돌아가자> 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누렸으나 아직도 이 Adventure를 Torment로 여기고 있는 몹쓸 내게 너무나도 필요한 시간이다. 루시처럼 담대한 믿음과 피터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에드먼드처럼 회개하되 수잔으로 돌아가지 않는 믿음을 지켜나가길, 그리고 이 모든 믿음의 모험을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해져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본다.